라이프로그


국립발레단 <안나 카레니나> 공연 후기 무대

한줄 요약: 설명충 발레. 너무 재미없어서 첫공 보고 나머지 공연 관람 취소함.
  
<안나 카레니나>는 처음부터 기대작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강수진 단장이 가져온 레퍼토리는 거의 대부분 본인이 무용수 시절 몸담고 있었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복사-붙여넣기였죠. 우베 숄츠의 <교향곡 7번>, 글렌 테틀리의 <봄의 제전>, 존 크랑코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조지 발란신의 <세레나데>, 마르시아 하이데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로버트 노스의 <트로이 게임> 모두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레퍼토리였습니다. 이 작품들이 좋다 나쁘다를 따지기 전에, 본인이 있던 발레단의 아시아 지부를 만들려는 것도 아닐 텐데 딱 본인이 있던 곳에서 접하던 작품만 가져오니 레퍼토리 선정에서 상당한 게으름이 보였어요. 크리스티앙 슈푹의 <안나 카레니나>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레퍼토리는 아니지만, 슈푹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상임안무가로서 오래 활동한 사람입니다. 아, 친구가 전막 새로 안무했다고 작품 사주는 거구나,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공연 전날 프레스콜 사진이 뜨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의상이 정말 아름다워서 사진발을 잘 받더라고요. 일단 눈이 보기 좋으니 작품 자체에 대해서도 한가닥 기대를 품고 첫공을 보러 갔습니다.

아, 발레에서 이런 설명충 처음 봤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원작은 보통 상, 중, 하 3권으로 분책되는 긴 소설입니다. 주인공 안나와 남편 카레닌, 연인 브론스키 외에도 키티와 레빈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의 비중도 크지요. 보통 영화나 발레로 각색을 하면 안나에 포커스를 맞추고 키티와 레빈 정도에 비중을 주게 됩니다. 그래야 2-3시간에 이야기를 넣을 수 있겠죠. 하지만 슈푹의 목표는 소설의 충실한 재현인듯 합니다. 안나-카레닌-브론스키, 키티-레빈, 돌리-스티바까지 세 가지의 관계를 모두 표현하는데다 덤으로 벳시와 벳시의 연인에게도 분량을 챙겨줍니다. 2막 발레에 이들의 사연이 모두 채워지려다 보니 안나가 희미해집니다. 국립은 이 작품을 '드라마 발레'라고 규정하려고 하는데, 여기 드라마가 어디 있나요? 장면의 나열만 있고 안나의 드라마도 브론스키의 드라마도 없습니다.
구성뿐만 아니라 안무도 설명충입니다. 발레는 어디까지나 춤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적인 동작을 넣을 수도 있지만, 꼭 옷을 한꺼풀 벗고 우리 지금 섹스하는 거예요, 라고 구구절절 드러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사실적 동작 외의 춤이 아름답고 보기 좋은가 하면, 무슨 동작이 있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인상적인 안무가 없습니다. 발레인데도 좋은 춤이 없어요.
무대장치도 열심히 설명을 합니다. 판자를 엮어 만든 상자 같은 무대장치가 의자가 되기도 하고 기차가 되기도 하는데, 무대장치가 기차가 되면 배경막에 기차 영상을 띄우고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이게 기차라는 것을 굉장히 친절히 알려줍니다. 브론스키가 경마를 할 때는 배경막에 말들이 달리고요. 키티와 레빈의 결혼식도 하객들이 모이고 단체 사진을 찍으며 자 이거 결혼식이야 하고 주입시켜 줍니다.
이렇게 설명이 가득한데도 이야기의 흐름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프로그램 북으로 미리 이 사람은 이 역할 저 사람은 저 역할이다 알아두지 않으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리기가 힘듭니다.
열심히 설명하는 와중에도 좋아 보이는 연출은 다 넣었습니다. 여러 가지 장치를 많이 해 두었는데 그것 하나하나에 의미가 없어요. 노이마이어의 <카멜리아 레이디>의 경우 피아니스트가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즐거운 파티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마그리트의 후원자가 피아노를 꽝 치며 파티를 끝내버리는 극적인 효과를 줍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왜 굳이 피아니스트가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해야 할까요? 가수는 또 왜 굳이 무대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해야 하고요? 그냥 멋있어 보이는 것이 의도라기엔 멋있지도 않네요. 전체적으로 유럽에서 쿨하다 여겨지는 요소들을 버무리며 노이마이어 흉내를 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그냥 또 하나의 범작이었구나 생각되시겠지만, 이 작품의 최대의 단점은 따로 있습니다.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구구절절 장면 설명을 떠먹이면서 주된 등장인물은 많고 볼만한 춤도 없고 어디서 본 듯한 것만 가득... 재미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 첫공과 막공을 예매해 두었는데, 첫공의 막이 내려가자 바로 든 생각이 '아, 이걸 또 봐야 하는 건가. 시간이 아깝다.' 였습니다. 예술의전당까지 왕복 4시간에 공연 2시간, 총 6시간을 두 번 다시 이렇게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막공 캐스팅 때문에 조금 고민을 했지만 제 시간(과 돈)은 소중했기에 관람을 취소했습니다.

제가 공연 관람에 사용한 시간도 아까웠지만, 이 공연을 올리는데 쓰인 돈과 무용가들과 스태프들의 시간과 노력도 너무 아까웠습니다. 이 작품은 평창올림픽 기념공연으로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억원의 지원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20억원이 어떤 작품을 올릴 수 있는 돈이냐면......이건 자료 조사를 해야 하는 건데 제가 더이상 <안나 카레니나> 때문에 손가락 품을 팔기가 귀찮아졌어요...... 공식적인 출처는 나중에 심심할 때 찾기로 하고 애호가 분의 블로그를 인용해 얘기해보면, 유니버설 발레단이 <오네긴>을 가져오는 데 11억을 썼다고 해요. <오네긴>은 드라마 발레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죠. 이런 작품 가져올 돈의 두 배로 노잼 설명충 작품을 가져왔네요... 그것도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으로요... 이래서 국립단체장 인선이 중요합니다. 친구 작품이라 가져왔다 할지라도 작품이 좋았다면 다들 칭찬했겠죠. 하지만 취임 4년차인 지금까지 가져온 작품 중 호평 받는 것이 얼마나 있나요? <봄의 제전>은 좋게 보신 분이 많지만 그 외에는 그다지 관객 반응이 좋지 않고, 클래식을 새롭게 연출한 <잠자는 숲속의 미녀>마저 국립발레단에 어울리는 버전은 아니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2014년에 상연하겠다 발표했다가 철회한 <나비부인> 역시 <안나 카레니나>를 능가하는 망작이었고요.
계속 "평창올림픽기념공연"이니 "평창올림픽 성공기원공연"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안나 카레니나> 줄거리 다들 아시죠. 귀부인이 바람났다가 현타와서 자살하는 내용으로 올림픽이라는 축제의 성공을 기원해요? 예를 들어 <잠자는 숲속의 미녀>라면 악을 물리치고 왕자님과 공주님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니(하이데 버전은 악을 물리쳤다는 부분이 조금 미묘하지만) 어떻게 갖다 붙일 수 있겠는데, <안나 카레니나>는 뭘 어떻게 미화해줘야 할지...... 안 그래도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잡음이 많은데 전망이 한층 더 어두워지는 느낌이네요...
캐스팅에 대해서도 한마디 안할 수가 없죠. 타이틀 롤인 안나 역의 김리회 씨는 키티 역까지 두 배역, 박슬기 씨는 키티 역에 더해 돌리 역까지 세 배역을 날짜별로 번갈아가며 췄습니다. 남자주인공 브론스키 역의 이재우, 박종석 씨는 각각 카레닌 역과 스티바 역을 번갈아 췄고요. 김명규A씨는 레빈, 스티바, 벳시 연인 역 세 개를 맡았습니다. 적어도 주역만이라도 한 배역에 집중하게 하면 안 되는 걸까요? 이렇게까지 무용수를 돌려막아야 한다면 그냥 더블 캐스팅을 할 수도 있잖아요.
국립은 벌써 몇 년째 이렇게 주역을 맡은 수석무용수가 조역 및 각종 솔리스트 역으로 매일 나오다시피 하는 게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해외 발레단에서 주역과 다른 역을 겸하는 경우는 군무 급에서 발탁된 무용수가 며칠 주역을 하고 나머지 회차는 군무나 솔로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수석무용수가 주역과 조역, 솔리스트 역을 같이 맡는다면 공연 횟수가 10회 이상 되어서 며칠 간격으로 나오는 경우고요. 이렇게 매일매일 주조역으로 혹사시키는 경우는 국립하고 유비씨밖에 못 보았네요.(다만 유비씨는 국립과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박슬기 씨가 뭘 시키든 잘 해내니까 믿고 일을 몰아주는 것인지... 공연 횟수가 (해외에 비해) 많지도 않은데, 이렇게 일부 수석무용수에게 여러 역을 주면 솔리스트 층의 무용수가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발레단에 랭크가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요. 기본적으로 수석은 주역을 시키고 솔리스트는 솔로를 시켜야죠.
무용가들이 작품을 어떻게 소화해냈는지에 대해서 안 썼는데, 쓸 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작품이 어느 정도 수준은 되어야 무용가들이 뭘 잘했네 못했네 얘기를 하죠... 누가 했어도 못 살릴 작품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한 무용가들에게 박수를 보낼 뿐입니다.

결론은 국립 레퍼토리에 믿고 거르는 작품이 하나 추가되었다는 것입니다. 재연된다면 아마 안 볼 것 같네요. 웬만하면 이 글 보시는 여러분도 보지 마세요. 그 돈으로 차라리 좋은 DVD 하나 사시거나 좀 더 보태서 다른 좋은 작품을 보세요.
이 작품은 커튼콜 사진 보기도 싫으니 사진은 패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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