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파리 오페라] <La Source> 라 수르스 (샘) 무대

2014년 12월 28일, 30일
NAÏLA: Sae Eun Park
DJÉMIL: Audric Bezard
NOUREDDA: Eve Grinsztajn
ZAËL: Axel Ibot

2014년 12월 29일
NAÏLA: Muriel Zusperreguy
DJÉMIL: Josua Hoffalt
NOUREDDA: Alice Renavand
ZAËL: Fabien Revillion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활동중인 박세은 씨가 언젠가 주역을 맡으면 보러 가고 싶다...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이루어졌네요.
제가 후기를 쓰지 못한 사이 해가 바뀌어 벌써 두번째 주역을 맡아 <백조의 호수>도 성공적으로 공연했고요.
박세은 씨의 공연 날짜는 12월 28, 30일로 예정되어 있었고 생소한 작품이다 보니 비교 감상을 위해 다른 주역이 공연하는 29일도 한번 더 예매해서 총 세번 관람했어요.

이 작품은 1866년 초연 당시 유행하던 이국적인 분위기(코카서스 지방과 오달리스크)에 요정의 세계가 더해져 있는 작품이에요. 원 안무는 소실되어 잊혀졌고, 쟝 기욤 바르가 새롭게 안무했습니다. 고전발레의 느낌을 주면서도 어디 다른 작품에서 본듯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독창성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어요. 무대 장치도 효율적으로 사용했고요. 

작품의 줄거리는 고전발레에 흔한 이야기인 사랑에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여자와, 그 여자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가는 남자의 이야기예요. 코카서스의 어느 부족이 이동 중 샘 옆에 잠시 쉬어갑니다. 무리의 리더인 모즈독의 누이 누레다는 닿을 수 없는 곳에 핀 신비한 꽃을 가지고 싶어하고, 남자 주인공 제밀이 몰래 지켜보다가 나타나 꽃을 꺾어다 줍니다. 이미 누레다에게 반한 상태인 제밀은 누레다가 쓴 베일을 걷어올리는데, 모즈독이 거칠게 떼어내고 부족 남자들과 함께 거의 죽을 정도로 때려눕힌 뒤 떠납니다. 혼자 남겨져 죽어가는 제밀 앞에 샘의 요정 나일라가 나타나 목숨을 구해줍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즐거운 파드되. 저는 이렇게 두 사람이 잘 되는 줄 알았으나 전혀 아니었습니다.

2막은 칸의 궁전에서 시작합니다. 누레다가 칸과 결혼하기 위해 들어오고 칸은 모즈독에게 누레다의 아름다움에 상응하는 지참금을 약속합니다. 칸의 총애를 받던 오달리스크 다제는 칸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누레다에게 반한 칸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그때 변장을 한 엘프들과 제밀이 나타나 마법과 묘기를 부리며 모두의 시선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나일라가 신비하게 등장하자 칸은 나일라에게 마음을 빼앗겨 누레다와의 결혼을 취소해 버립니다.
장면이 바뀌어 절망하는 누레다 앞에 제밀이 나타나 구애하지만 모즈독에게 들켜서 죽음의 위기에 빠집니다. 이때 나일라가 나타나 시간을 멈추고 제밀과 누레다를 데리고 도망칩니다. 제밀은 누레다와의 사랑을 이루어 달라고 나일라를 조릅니다. 나일라는 결국 자신의 목숨을 바쳐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루어주고 죽어갑니다.

박세은의 공연을 볼 때마다 정말 특별한 무용수라고 생각했어요. 무대 위에서 빛이 난다는 느낌. 이 무대에서도 주변을 화사하게 만드는 아우라가 있었습니다.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요정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가볍고 사뿐사뿐, 사랑스러운 느낌, 어딘가 인간과는 다른 신비로운 분위기. 처음에는 타고난 개성이 요정에 어울려서 그런걸까 했는데, 팔의 움직임이나 동작 하나하나가 요정같이 보이도록 연구를 많이 한 것 같았어요.
29일에 주역을 맡은 뮤리엘 주스페르기(Muriel Zusperreguy)도 굉장히 아름답고 잘하는데, 그 부분이 다르더라고요. 스와닐다나 리즈 같은, 장난스러운 아가씨로 보였어요. 요정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였던 거죠.
물론 박세은 씨는 요정같은 존재감이나 단순한 움직임 뿐만이 아니라 춤도 놀라웠어요. 나일라의 춤에는 32회전 푸에테처럼 화려한 테크닉은 없어요. 점프나 회전은 주로 남자 무용수들이 보여주고, 나일라의 춤은 어찌 보면 평범한 동작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요. 그런데도 스텝 하나하나와 점프 하나하나에서 힘들이지 않는 가벼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1막 솔로에서 피케 마네쥬에 이어 점프하는데, 그야말로 날아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객석의 분위기에서 동일한 감탄이 느껴졌어요. 다른 날에 비교해 관객의 반응에서 확연한 온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연기에도 호소력이 있었고요.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의 사랑을 이루어 주기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하는 상황을 관객이 이해하고 감정을 이입하기는 어려운 작품이죠. 그런데도 '이대로 계속 살아가도 그의 사랑은 얻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이라는 슬프고 안타까운 감정이 전해졌어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공연은 2007년에 <고집쟁이 딸>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주역도 게스트였던 스베틀라나 룬키나였고, 작품도 애쉬튼 작품이라 발레단의 개성이나 특색은 잘 느끼지 못했었죠. 이번에 <호두까기 인형>과 <라 수르스>를 보면서 가장 많이 느낀 점은... 남자 무용수들이 정말 잘한다는 거예요. 그거야 당연한 얘기인데... 아라베스크 하나를 해도 높은 드미포인트로 아름다운 라인이 나오고, 점프 동작 하나도 가볍고 높게 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았어요. 솔리스트 역할인 초록색 엘프와 그의 부하 격인 파란색 엘프가 있는데, 그중에 제일 잘하는 사람이 가운데의 초록색 엘프를 하고 파란색 엘프는 조금 덜 잘하는 사람이 하는 거겠지, 하고 봤더니 다 똑같이 잘해요!!!

제밀은 남자주인공이지만 히어로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호감이 가지 않았어요...나일라가 인간 행세까지 하면서 자리를 다 마련해 주었는데 누레다 앞에서 쭈뼛쭈뼛대는 모습이 너무 답답했어요 ㅠㅠ 자기 사랑 이루어야 하니까 넌 죽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도 너무 어이없고요 ㅠㅠㅠㅠ 발레에서 이런거를 뭐하러 따지냐 싶지만, 무용수가 아무리 잘해도 커버가 안 되는 찌질함이었네요...... 제밀이 멋있었던 건 높은 곳에 피어 있는 꽃을 꺾는 듬직한 모습과 바리에이션에서 인간 같지 않게 높이높이 나는 점프... 그러나 매력이 부족한 캐릭터예요.

오히려 모즈독 역할이 인상적이었어요. 28, 30일의 모즈독은 좀더 악당같은 느낌으로, 잘 먹고 잘 살려고 누이를 칸에게 넘기는 것 같았다면 29일의 모즈독은 누이를 아끼고 부족을 염려하는 멋진 리더같은 느낌이더군요.

29일의 누레다 알리스 르나방은 어딘가 쓸쓸해보이면서도 강인해보이는 미인, 다제는 고혹적인 미인으로 각자의 역할에 잘 어울렸어요. 둘 다 무대에 얼굴이 드러난 순간 '와! 예쁘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름다워요. 다만 역시 캐릭터적으로 따져보면 누레다는 늘 수동적으로 모즈독-칸-제밀에게 끌려다니지만, 다제는 당돌하게 사랑을 갈구해서 호감이 가더라고요.

좋은 공연도 보고 파리 구경도 잘 하고 느긋하고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다녀오길 잘 했어요... 또 가고 싶네요.




28일 커튼콜

30일 커튼콜

29일 커튼콜


덧글

  • eugene 2015/04/01 12:08 # 삭제 답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스텝 하나하나와 점프 하나하나에서 힘들이지 않는 가벼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1막 솔로에서 피케 마네쥬에 이어 점프하는데, 그야말로 날아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객석의 분위기에서 동일한 감탄이 느껴졌어요. 다른 날에 비교해 관객의 반응에서 확연한 온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29일주역 뮤리엘을 보고 쓰신건가요?
  • Reina 2015/04/01 14:08 #

    eugene님 안녕하세요. 안그래도 그 문단 연결이 좀 마음에 걸렸는데 ^^; 박세은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글 수정해 놓았어요.
  • eugene 2015/04/01 18:45 # 삭제 답글

    그렇군요! 아무래도 박세은씨 말씀하시는 것같아서 여쭤봤어요. 설명 감사합니다. 항상 글 잘보고 있습니다 ^^
  • Reina 2015/04/24 14:55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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